'임금노동과 자본'을 '가계와 기업'으로 대체한 현대 경제학의 비밀
굳이 맑스의 논의를 따르지 않더라도, '노동자와 자본가' 라는 구분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법이다. 그런데 현대 (주류) 경제학 텍스트나 경제기관 보고서들에서 이런 개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용어는 현대 경제학에서도 핵심요소를 이루고 있지만, 이는 대표적인 생산요소를 지칭하는 물적 개념일 뿐 '~者'나 '~家'를 붙일 수 있는 주체적 개념이 아니다. 노동시장을 분석할 때 '노동인구'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경제활동의 한 주체나 집단으로서 '노동자'라는 이론적 개념은 없다고 봐야한다. '자본가'는 더더욱 그렇다.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장경제의 3주체'는 가계, 기업, 정부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정부'는 가계나 기업으로부터 거둔 세금을 기초로 이를 보조하는 제 3자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의미에서 경제주체는 '가계와 기업'으로 양분된다고 볼 수 있다. 가계와 기업은 생산물 시장과 생산요소 시장에서 각기 다른 수요자-공급자로서 역할한다. 가계는 '소비자'로서 생산물을 구매하고, 기업은 '생산자'로서 판매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자본시장과 노동시장에서 가계는 각각의 생산요소를 제공하는 공급자로서 기능하고, 기업은 이를 제공받아 생산에 나서는 수요자로 나타난다.
주류경제학의 세계에서 '가계'라는 경제주체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의 소유자다. 어떤 의미에서 가계는 노동자이면서도 자본가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특정 가계 집단이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자본과 노동은 각각 물적요소와 인적요소라는 차이만 있을 뿐 '소유물'로서는 동등하며, 일정한 양적 기준에 따라 대체가능한 생산요소일 뿐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구분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계와 기업'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서로 대응하는 개념일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노동과 자본은 가계의 범주에 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기업은 '자본'이 아니다. 경제학에서 '기업'은 생산의 주체이지만, 소유의 주체는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 기업은 '법인'으로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형태로 기업에 대해 지분이나 청구권을 가진 주체들(궁극적으로는 가계)에게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의미다.
가계는 자신이 소유한 생산요소를 기업에 제공(혹은 '대여')하고, 기업은 제공받은 자본과 노동을 결합해 생산을 한다. 기업은 일종의 공간이자 조직인 셈이다. 기업은 소유의 주체가 아니므로 생산을 통해 창출된 소득은 생산요소를 제공한 보상으로서 가계에 분배된다. 자본을 제공한 대가는 '자본소득'(이윤이나 이자는 여기에 포함된다)으로, 노동의 대가는 '임금'으로 분배된다. 가계는 이렇게 얻은 소득으로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해 소비한다.
여기까지가 현대 경제학이 설명하는 생산-분배-소비의 과정이다. 여기엔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대립이나 착취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가계를 이루는 수많은 개인들이 기업이라는 공간에 모여 생산을 행하고, 각자가 기여한 만큼의 몫을 나눠갖는다. 각 가계는 자본 또는 노동을 소유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동등하며, 다만 각자가 소유한 자본과 노동의 양이 다를 뿐이다. 자원 소유의 초기조건이 어찌됐든, 매번의 생산은 사회적 최적의 수준에서 이뤄지고 분배 역시 '기여한 만큼' 공정하게 이뤄진다. 등가교환의 원리는 적용되고, 일시적인 불공정 거래가 개입하더라도 시장경쟁은 이를 시정할 힘을 갖는다.
현대경제학과 (맑스주의를 포함한) 정치경제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계급' 개념의 유무에 있다. 정치경제학은 임금노동자, 자본가, 지주라는 자본주의의 3대 계급이 형성하는 생산관계와 소득의 분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계급대립을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현대 경제학은 이러한 계급관계를 '가계'라는 동일한 주체로 통합시킨 후 무수한 개별적 단위들로 쪼개버렸다. 그들이 묘사하는 경제 구조 속엔 더이상 '대립'은 없고 '조화'만이 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