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일반

20140526 빚 탕감 프로젝트의 유효성

맹군_ 2014. 9. 30. 20:53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방원으로 나오는 안재모가 내 고딩 시절엔 야인(野人) 김두환이었다. 구마적을 제압한 김두환이 종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기존의 절반만 받기로 해 상인들이 열광하는 걸 보며 당시 어렸던 맹군은 "오 남자네" 하면서 멋있어했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서 젊은 국어쌤이 이를 언급하며 "국가 세금도 아니고 깡패가 자릿세 받아가는데 절반 받는다고 영웅이냐"며 비난을 늘어놨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초 공약으로 실천한 '국민행복기금'을 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정책은 예컨대 국가가 원리금 100만원짜리 부실채권을 시장에서 3~10만원 정도에 사온 다음, 50%를 탕감한 50만원을 대부업체 대신 국가에서 받아주는 정책이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못된 채권추심업체들 대신 국가가, 그것도 빚을 절반이나 줄여서 받아주니 좋아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김두한에 열광하는 종로상인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채권은 해당 채무자에게서 빌려준 돈을 받아낼 수 있는 권리를 나타내는 증서인데, 부실채권은 시중에서 싼 가격에 사고 팔린다. 부실채권은 채무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걸 의미하기 때문에, 어짜피 제값 못받을꺼 빨리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현금을 받고 이 '돈 받아낼 권리'를 팔아버리자는 것이다. 채권을 파는 사람은 적은 금액이나마 빨리 현금회수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사는 사람은 사들인 가격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금액으로 '뜯어낼 수 있다면' 무조건 이득이다.

종로의 한 영세상인이 은행에서 빌린 돈의 원리금이 100만원이고, 가게가 쫄딱 망해서 갚은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하자. 연체가 계속되다보면 은행에서는 이를 손해액으로 잡고 부실채권으로 처리해 시중에 내다 판다. 그러면 대부업체들이 이를 3~10만원을 주고 산다. 그러면 그 빚의 '주인'은 은행에서 대부업체로 바뀐다. 적당한 협박과 보이지 않는 힘(!)을 동원해 채권 사는데 들인 돈 이상으로 종로상인에게 받아내기만 하면 수익이 생긴다. 국민행복기금은 국가가 이 '대부업체'의 역할을 자임해 50만원까지 뜯어내겠단 소리다. 처음부터 은행은 10만원도 못받을꺼라고 '부실'처리했던 걸 자기들이 '절반'을 깎아주겠다고 "역시 나랏님 밖에 없지?" 하면서 국고로 챙겨가는거다.

자본주의는 사적소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다. 하지만 소유권은 소유한 자들에게만 천부적 권리이고 소유하지 못한자들에겐 뭔가를 토해내야할 '의무'로 작용한다. 채권-채무관계, 즉 '빚'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빚을 받아낼 수 있는 능력은 갚을 수 있는 능력에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갚아야 할 의무는 무한하다. 따라서 받아낼 권리 역시 소유한 자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위대하신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재산권은 이를 보장하는 물질적 장치다.

돈을 빌려줬을 때 이자를 붙여서 받는다는 것은, 원리상 갚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노동이 됐든 투자가 됐든) 원금을 회수하고 이자 이상을 벌어들 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빌린 돈을 투자한다면 이자율 이상으로 이익률을 올려야 하고, 노동을 한다면 원리금 이상으로 임금을 벌어야 한다. 빚쟁이들이 돈을 받아낼 능력은 이처럼 빚을 진 사람들이 돈 버는 능력에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그래서 채권의 가치는 그 능력에 따라 요동을 친다. 그러나 빚을 갚을 의무의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하늘이 내려준 인간의 신성한 '소유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빚 탕감 프로젝트'는 채권추심업체나 국민행복기금처럼 부실채권 시장에서 싼 값에 사들인 후, 이 채권에 걸려있는 채무관계를 아예 청산시켜버리자는 운동이다. 2000만원의 성금을 모집해 20억원의 빚을 해소하는 걸 목표로 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메커니즘에 기반한다. 사적소유에 기반한 채권-채무관계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민수전'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급능력이 없는 장기 채무연체 취약계층들의 족쇄를 풀어준다는 점에서 '과전법'의 효과는 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유권에 전혀 타격이 없지는 않을테다. 사실상 '기만'이라 볼 수있는 국민행복기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빚을 쉽게 탕감해주면 애초에 지급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돈을 막 빌려가서(이것을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라고 부른다)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 못한다는 것이다. 양심껏 빚을 갚는 사람들만 손해라는 위협까지 덧붙여가면서 말이다. '빚 탕감 프로젝트'라면 오죽할까. 채권자들, 소유한 자들에게는 원금의 1%가 남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야 하는게 자신들의 '도덕' 혹은 규범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도덕을 깨나갈 수 있다면 이 역시 '운동'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