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융자산의 일종인 법정화폐
마르크스에게 화폐는 곧 상품화폐(금)였지만, 오늘날 금은 더이상 화폐로 기능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법정화폐인 동전과 지폐가 화폐의 지위를 얻었다. 금이 화폐이던 시절에도 법정화폐가 통용됐지만 금태환이 보장되는 '대리 화폐'였다고 할 수 있다. 더이상 상품화폐로 태환되지 않는 법정화폐는 어떤 근거로 화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자본론에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은 것인 이상 일정한 해석이 요구될텐데, 그 이전에 주류의 화폐이론을 정리해보는게 우선이라 생각된다.
실물 상품이나 금에 의한 지급보증이 없는 법정화폐는 당연히 내재적인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그 종이(혹은 금속덩어리)는 액면에 찍힌 금액만큼의 교환능력을 갖는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중앙은행권이 생산비용보다 훨씬 높은 금액의 구매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이름 그대로 '법적으로 통용력이 부여된' 덕분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상품화폐인 금은 화폐이기 이전에 가치를 갖는 재화이지만, 법정화폐(앞으로는 그냥 화폐라고 하자)는 미래의 재화 소비에 대한 '청구권'에 가깝다. 현재의 구매력을 미래의 시점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수단이면서, 실물재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화폐는 '금융자산'의 일종이다.
2. 만기가 없는 금융자산
대표적인 금융자산인 채권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쉽다. A가 액면 1만원짜리 채권을 발행해 B에게 팔았다면, 채권소유자 B는 대부자, A는 차입자가 된다. 채권발행액 1만원은 A에게는 갚아야할 '부채'로 잡히고, B에게는 (금융)'자산'으로 잡힌다. 모든 금융자산이 그러하듯 이 채권은 '만기'와 '이자(수익)'이 존재한다. B가 채권을 산다는 것은 미래의 수익을 위해 일정 기간동안 자금의 사용기회를 포기하고 A에게 자금을 빌려준다는 의미다.
화폐 역시 비슷한 과정이 진행된다. 중앙은행이 A의 위치에, 민간은행(또는 정부)가 B의 위치에 선다. 중앙은행이 1만원권을 발행해 정부에 팔면, 화폐발행액 1만원은 중앙은행에는 '부채' 민간은행에는 '자산'으로 잡힌다. 이제 민간은행이 보유한 화폐는 '중앙은행이 여기에 쓰여진 금액만큼 빚을 졌다'는 채무증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민간은행은 이 증서를 모든 거래의 지급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채무자에게 받은 어음을 다른 거래에 지급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럼 민간은행이 '화폐' 자산을 구매하는 대가로 중앙은행에 제시하는 것은 뭘까? 바로 채권이다. 여기선 앞의 예시(채권발행)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앞의 예에서는 차입자가 채권을 발행하고 현금을 받는데, 여기서는 차입자(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고 채권을 받는다. 채권을 받은 중앙은행은 채권소유자로서는 동시에 대부자가 된다.
그런데 화폐는 보통의 금융자산과 다른 점이 있다. 중앙은행의 부채로 잡힌 화폐발행액은 지급해야할 이자가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갚아야 될 기한도 없다. <즉, 화폐는 만기와 이자수익이 없는 특수한 금융자산이다.> 법적 통용력이 부여됐다는 것은 만기와 이자 없이도 화폐가 통용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법정화폐는 수표와 같이 실제 지불을 요구할 수 있는 금융자산을 근거로 발행되는 '신용화폐'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로 인해 중앙은행은 내재적인 가치도 없고, 담보도 없는 종이쪼가리를 가지고 '돈 주고 돈 먹기'가 가능해진다. 화폐를 발행하면서 발행액만큼의 부채를 지지만, 동시에 그 대가로 받은 채권에 대한 대부자가 된다. 화폐발행 부채는 만기가 없지만, 채권은 만기가 되면 화폐로 상환된다. 상환된 화폐만큼 부채가 소멸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중앙은행은 채권을 매입하거나 매도하는 방식으로 화폐량을 조절한다. 바로 '공개시장조작'이다.
3. 이자수익이 없는 금융자산
중앙은행에게 화폐는 '부채'이지만, 화폐소유자에게 (상품이든 다른 자산이든) 일정한 만기까지 원금을 상환해야할 의무가 없다. 이는 금태환 없이도 법정화폐가 통용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지만, 금융자산으로서 자격이 없지는 않다. '영구채'와 같이 평생 이자만 지급할 뿐 만기가 없는 금융자산도 존재하니까.
하지만 화폐는 이자를 지급하지도 않는다. 이 사실은 당장 문제를 일으킨다. 수익이 없는 금융자산을 대체 누가 사겠는가?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민간은행이나 정부 입장에서는 아무런 수익이 나지 않는 화폐를 보유하는 것 보다는 0.1%라도 이자를 가져다주는 다른 금융자산을 보유하거나 대출을 해주는 방식을 택하는게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분명 화폐는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
이로 인해 주류경제학 화폐이론의 대부분은 '화폐수요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계산단위의 기능을 제외하면, 화폐의 기능은 크게 1) 교환의 매개(거래수단), 2) 지급결제수단, 3) 가치저장수단(자산)으로 나눠진다. 이자수익이 없기 때문에 가치저장수단으로서 화폐는 전혀 매력이 없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금융이 원활하게 작동된다는 가정하에) 모든 거래는 화폐 없이 신용거래(외상)가 가능하고, 지급결제는 화폐가 아닌 다른 금융수단을 통해서도 종결될 수 있다. 그럼에도 화폐 수요가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화폐경제학의 제 1목표가 된 것이다.
고전적인 화폐수요론은 케인즈의 '유동성 선호론'이 있고, 현대에 와서는 거래시간 단축이론, 화폐효용이론, 불확실성 하의 담보계약이론 등 다양한 설명들로 채워지고 있다.
4. 내재적 가치 없는 화폐
가치론이 없는 주류경제학에서 불환법정화폐는 '만기 없는 금융자산'이라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근거를 얻는다. 어짜피 금융자산이란 일반 상품과 달리 미래에 실현될 수입과 수익률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청구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경우 이자수익 없는 금융자산인 화폐가 왜 사용되는지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화폐론'(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이 존재할 수 없는 주류경제학은 화폐수요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가정과 모델들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주류경제학이 금융수단의 하나로서 화폐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면, 마르크스경제학은 화폐의 본질로부터 금융의 발생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경제학의 화폐론 역시 금태환이 사라진 법정화폐의 내재적 가치를 정의할 수 없다는 난제에 빠졌다. 분명 <자본론>에도 불환지폐나 신용화폐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하지만 이는 상품화폐로서 내재적 가치를 가진 '금' 화폐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제는 불환지폐가 이전의 금이 했던 기능을 물려받아 상품교환과 신용창출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법정화폐의 가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마르크스적 화폐론, 나아가 금융이론이 풀어야 할 일차적인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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