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비차스 등, <자본주의의 국가 : 경제, 사회, 헤게모니> 번역

2007-09년 이후 과도기가 전개됨에 따라, 중심부와 주변부 모두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의 메커니즘에 더욱 깊이 의존하게 되었다. 팬데믹 위기 시기에 특히 두드러졌던 것은 중심부 국가들이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력과 자본주의 경제의 국가 의존도였다.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이후, 이제는 국가의 지지 없이는 지속적인 자본주의적 축적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점에서 중심부 국가의 역량은 주변부 국가와 차원이 다르다. 중심부 국가들은 자국의 법정화폐를 통제함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경제운영에서 불가결한 존재로 자리잡을수록, 소수 자본가 과두지배층의 국가기구 장악력도 커지게 된다. 민주주의 제도는 점차 위축되었으면, 특히 노동자들과 지역 공동체를 정치적 삶과 연결해주던 중간 매개 구조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주류 정치는 실패와 무관심으로 얼룩졌고, 인민주권은 사실상 사라졌다. 중심부 국가들조차 예외는 아니다.

중심부 경제·사회·정치의 침식, 글로벌 생산·무역·금융의 지속적 재편, 이례적으로 높아진 국가의 경제 개입 수준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축적이 새로운 역동적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철저히 억제되고 있으며, 계급 권력은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극소수 계층에게 여전히 집중되어 있다. 새로운 질서의 출현은 요원해 보인다.

전지구적 수준에서의 위기는 명백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수십 년간 세계는 사실상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과도기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의 단일 패권은 종말을 맞이했다.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헤게모니 경쟁이 시작되었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은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한 다국적 기업, 다른 한편으로는 국경을 넘어 각국 경제에 적극적으로 침투한 국제 금융자본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의 헤게모니와 제국주의를 이끄는 근본 동력이었다. 미국은 이 극도로 공격적인 사적 자본의 결합체가 이윤을 추구하기에 적합한 제도적 환경을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이를 통해 미국은 세계경제 전반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했고, 중심부의 순응과 주변부의 종속을 강제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생산적 축적이 약화되는 것을 방치하는 동시에, 끊임없는 전쟁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그 우위를 낭비해버렸다. 이 시기에 출현한 독자적인 자본축적의 중심지들(특히 아시아)은 국민국가의 강력한 역할에 기반하고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강국이 점차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은 자국 이익에 부합하는 세계경제 제도를 구축하는데 영향을 미치려 한다.

헤게모니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이데올로기적 권력에도 의존하기에 오늘날 인류는 치명적인 위험을 마주하고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러시아를 세계경제의 제도적 틀에서 배제하기 위한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여기에는 세계화폐로서의 달러 메커니즘에서 러시아를 축출하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중국을 비롯한 다른 강대국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고, 이들은 곧바로 대체 수단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순순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 자본주의가 이미 소진되고 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막대한 경제·정치·군사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반미 진영 형성의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경쟁자들은 앞으로도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 확충에 힘쓸 것이다. 지금의 과도기는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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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위기의 시대

역사적 공백기(A historical interregnum)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 사회, 정치의 격변을 불러오며 수년간 누적된 긴장을 증폭시켰다. 이 보건 위기는 각국 경제와 사회를 붕괴시키며 국민국가를 전례 없는 중심적 위치로 부상시켰다. 이어 2022년에는 시대를 상징하는 지정학적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개입으로 미국과 주요 유럽 동맹국이 개입한 전면전이 벌어졌고, ·중 간의 지정학적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2020년대 초반은 팬데믹 위기(Pandemic Crisis)’라 부를 수 있으며, 이는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사회와 정치의 구성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된 이후 30년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전 세계에 걸쳐 지배적인 질서로 자리잡았으며, 그 결과는 심각한 사회적 긴장과 새로운 헤게모니 경쟁의 출현이었다. 이 시기의 결정적 사건으로는 2007~2009년의 대공황(Great Crisis), 미국과 동맹국들이 중동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잇달아 벌인 전쟁이 있다. 여기에 코로나19 출현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더해지며 세계적 불안정성이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의 근원은 자본주의적 축적 자체에 있다. 이 점에서 2007~2009년 대공황 이후의 시기는 잘 알려진 그람시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공백기(historical interregnum)에 해당한다.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하고 있어 온갖 병리적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1)인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중심부 경제는 취약한 생산과 약탈적 금융으로 특징지어진다2). 금융화는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며, 금융은 정부 정책의 주요 수혜자이자 극소수 과두지배층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원천이 되었다. 선진 자본주의의 역사적 중심지들에서 경제성장은 미약하고, 고용은 불안정하며, 빈곤은 만연하고, 소득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며 심각한 사회적 균열을 낳고 있다. 40년 넘게 세계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자본주의는 이제 소진될 징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보건 위기는 유급 노동시간과 무급의 지루한 재생산노동 시간 사이의 구조적 불균형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 위기는 중심부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당 부분이 여성과 소수인종 및 소수민족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오랜 세월 여성주의자들이 일터에서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싸워왔지만, 팬데믹 기간 동안 재생산노동의 상당 부분은 다시 여성들에게 전가되었고, 가정 내 가정폭력 또한 증가했다.

세계경제 주변부에서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새로운 중심지가 등장하며 경제 활동의 세계적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인류는 여전히 저소득과 취약한 고용조건에 갇혀 있다. 주변부 국가들의 세계경제 편입은 새롭고 해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생산·무역·금융이 교차하는 네트워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은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었다. 보건 위기는 이윤 추구가 인류와 자연 간 유해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증거를 보여주었다.


1) 그러나 그람시의 간결한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G. Achcar(2022), ‘Morbid Symptoms: What Did Gramsci Really Mean?’, Notebooks: The Journal for Studies on Power, 1 (2), 37987

2) 이 책 전반에 걸쳐 중심부(core)과 주변부(periphery)의 구분을 사용하지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 분야에는 격렬한 논쟁들이 얽혀 있기에 그 중 일부는 이후 장들에서 간략히 검토된다 불필요한 용어 논쟁은 피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시작부터 불균등한 발전을 특징으로 해왔지만, 중심부과 주변부의 분석적·지리적 경계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중요한 점은, 현재의 불균등성이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관계가 전 세계를 지배한 결과이며, 더 이상 () 자본주의적이거나 () 자본주의적인 특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늘날 중심부주변부의 구분은 과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후 장들에서 그 분석적 함의를 점진적으로 밝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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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국가> 1장. 위기의 시대 (2)  (2) 2025.08.19

“[가변자본의 변화가 고용증가 없이 임금 50%인상에 기인하는] 이 경우 20명의 노동자는 (..) 더 많은 노동수단(즉 도구, 기계)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원료 또는 보조재료는 1/2만큼 증가해야 할 것이다.” (자본론 3권 3장 중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을 정의할 때 분자에는 생산수단의 양이 들어가는데, 분모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좀 애매했다. 자본론에서 이를 ‘노동량’으로 쓴 부분도 있고, ‘노동자의 수’로 쓴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량은 노동력이 지출되는 시간으로 계산되지만, 노동자의 수는 노동력을 지출하는 인간의 머릿수로 계산되므로 엄연히 다르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생산수단의 두 범주인 노동수단(도구,기계)과 노동대상(원료,보조재료)의 경우를 다르게 보고 있는 듯. 3권 3장은 도입에서 노동생산성 불변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기술적 구성 역시 불변이다. 인용한 예는 노동자의 수는 20명으로 불변이지만 임금이 50% 상승에 따라 (잉여가치율 유지를 위해) 노동시간도 50% 연장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응해 노동수단은 불변이고 노동대상은 50% 증가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례관계는 ‘생산물의 양’을 고려하면 훨씬 이해가 쉬워진다. 노동생산성은 일정한 노동시간에 생산되는 생산물의 양을 의미한다. 노동생산성이 일정하다는 가정하에서 생산량은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원료나 보조재료같은 노동대상은 생산량에 비례하므로 자연히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반면 노동수단은 생산물의 양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노동자의 수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자본의 기술적구성’의 분모가 되는 변수는 분자에 노동수단이 오느냐, 노동대상이 오느냐에 따라 노동자의 수 일수도, 노동량(시간)일수도 있다는게 오늘 퇴근길 독서의 소득.

이윤율의 분모는 총자본’스톡’이다. 그중 고정자본스톡은 기업의 대차대조표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나, 유동불변자본스톡과 가변자본스톡은 대응하는 항목을 찾기 어렵다. 대차대조표의 현금성자산과 재고자산(원재료/재공품/완성품)의 합을 총 유동자본스톡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중 얼마가 불변자본이고 가변자본인지는 알 수 없다. 반대로, 유동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플로우’는 손익계산서에서 연간 원재료 소모액과 임금지불액으로 나타난다. 두 값의 합늘 총유동자본플로우라고 할 수 있다. 두 재무재표에 나타난 유동자본의 스톡과 플로우의 비율이 곧 회전수(회전율)이다. 유동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스톡’은 이 회전수를 매개로 연간 원재료소모액과 임금지불액 ‘플로우’로부터 역계산을 할 수 있다. 이건 내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 4장 ‘회전이 이윤율에 미치는 영향’에서 제시한 방법이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본다.

“자본가가 자기의 사업에 얼마나 많은 가변자본을 투하하고 있는가는 대부분의 경우 자본가 자신은 모른다. 제2권 제8장에서 이미 보았으며 앞 으로도 또 보게 되겠지만,자본가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는 자본의 구별은 고정자본(fixed capital)과 유동자본(drculating capital) 사이의 구별이다. 유동자본 중 화폐형태로 그의 수중에 있는 부분은 (은행에 예금되어 있지 않는 한〕금고 안에 있는데, 이 금고로부터 그는 임금을 위한 화폐와 원료/보조재료를 위한 화폐를 꺼내며, 이 두 가지 모두를 동일한 현금계정에 기 입하고 있다. 만약 그가 임금지불을 독립된 장부에 기록한다 하더라도 이 기록은 연말에 가면 연간의 임금지불총액 vn을 가리킬 뿐이며 (투하)가변자본 v 그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가변자본 v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자본 가는 특별한 계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이제 그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이어 마르크스는 수치예를 통해 플로우(일정기간사용액)와 스톡(일정시점투하량)을 구분하며 가변자본스톡과 연간잉여가치율을 구해낸다.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에는 단순화를 위한 몇가지 가정이 있다. 고정자본과 감가상각이 고려되지 않았고, 유동자본의 1회전기간만을 고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요 며칠간 재생산표식을 기업회계에 대응시켜보는 작업을 좀 해봤더니 몇가지 가정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미리 요약하자면, "생산한만큼 판매하고, 판매한만큼 구매한다"는 가정이다.

1) 화폐자본스톡(=생산요소 구매를 위한 현금성자산)의 증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분석기간 내 상품 판매의 대가로 얻은 화폐가치(매출액)는 전액 지출된다. 설사 기초 화폐잔고가 존재해 당기의 생산요소 구매나 자본가의 소비를 위해 미리 지출했다고 하더라도, 당기 매출액으로 그만큼을 채운다고 가정하면, 스톡의 증감은 없다.

2) 상품자본스톡(=완성품 재고)의 증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매출액은 당기 생산된 상품가치와 같다. 설사 기초의 상품재고가 기중에 판매됐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만큼의 당기 생산액이 재고로 쌓인다고 보면 스톡의 증감은 없다.

3) 생산자본스톡(=고정자산+원료/재공품 재고)의 증가는 잉여가치 중 소비되지 않고 추가자본으로 축적되는 부분에 의해 발생한다. 1)의 가정에 따르면, 화폐로 실현된 잉여가치 중 자본가의 소비를 뺀 부분 중에서 화폐로 추가 보유하게 되는 부분은 없다. 따라서 자본축적분은 모두 생산수단이나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생산자본스톡의 증가로 나타난다.

재생산표식 그 자체를 통해서 경기순환 또는 주기적 공황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이유는 이처럼 재생산표식이 기업의 화폐보유나 상품재고의 변동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모형이기 때문이다. 모형 내에 고정자본과 연간 회전율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화폐와 재고의 변동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은 모형은 여전히 균형성장을 위한 조건만을 보여줄 뿐이다. 오히려 재생산표식은 그러한 균형성장이 매우 엄격한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숨은 가정("생산한만큼 판매하고, 판매한만큼 구매한다")이 사라지는 지점부터 경기순환과 공황의 분석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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