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청년 실업은 청년들의 높은 눈높이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주류경제학 논리에 따르면, 균형 수준에서 발생하는 실업은 원론적으로 '자발적/자연적 실업'이다. 직업 탐색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일을 쉬는 등 균형임금 하에서 실업상태는 개인의 선택이다. 김무성의 논리처럼 더 낮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들이 있음에도 그곳에 취업하지 않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눈높이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란 것이다.
노동이 생산에 기여하는 만큼 시장에서 임금이 주어진다는 주류의 담론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해지곤 한다. 과연 청년들은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걸까? 질문을 다르게 해보자. 청년들의 눈높이는 정말 개인의 욕심에 따른 선택의 결과일까?
마르크스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화폐임금의 배후에 '노동력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가치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을 정상적인 수준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 비용이다. 현실의 임금수준은 노동력의 가치보다 높을수도 있고 낮을수도 있지만, 그 이하일 경우 정상적으로 일할 능력을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주류이론에서 임금은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만큼의 몫이라고 말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노동자 '자신'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몫이다. (이런 차이는 착취론으로 이어지지만 일단 논외로 하고,) 이런 마르크스의 노동력가치 개념에 따라 임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왜 청년들의 눈높이가 높을까? 다시말해 왜 청년들은 저임금의 일자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실업을 자초하는가? 이는 청년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성(주류에서 말하는 균형임금수준) 이상의 임금을 요구하는 눈높이 설정 때문이 아니다. '노동력 가치'개념에 따르자면, 거꾸로 시장에서 주어지는 임금이 청년 노동력의 정상적 재생산을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눈높이는 물질적 근거를 갖는다. 김무성 같은 어른들 말처럼 "너도나도 대학교육받고 수준만 올라가서" 그렇다는 건 절반만 진실이다. 대학교육이 욕심을 키운게 아니라 비용을 늘린 것이다. 대학교육은 청년들이 사회적 생산활동 속에서 한명의 노동력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각종의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대학이 '너도나도 다 다니는' 공간이 되면서 모든 교육비용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의미하는 '노동력 가치'를 전반적으로 상승시킨다. 대학 교육 뿐일까. 취업전까지 20년간의 교육비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청년(자녀)들의 교육비가 부모의 노동력 재생산비용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정정도 옛말이 됐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대학등록금을 미래의 임금을 담보로 대출에 의존해 충당하고 있다. 시작부터 마이너스인 인생들에게 시장이 내미는 월급 봉투는 눈높이를 따지기 이전에 노동자로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곧 '생존'이다. 청년의 눈높이를 높인 건 개인인가 사회인가?
교육비는 하나의 예다.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규정하는 데는 수많은 필수적/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작용한다. 임금노동자들이 노동력 가치만큼의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 하에서조차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다. 일자리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눈높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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