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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잉여가치론

20140709 분배는 '생산과정'을 두고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계급투쟁이다

분배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맑스에게 분배는 생산된 몫을 어느 계급이 더 많이 가져가느냐 하는 정치적 싸움이 아니다. 분배는 '생산과정'을 두고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계급투쟁이다.

분배 문제를 논할 때 임금이 '현실적으로' 선불이냐 후불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중요해질 수 있다. 일단 주류(신고전파)를 포함한 많은 이론은 후불을 가정하는데, 맑스는 선불에 기초한다. 이는 생산과 분배에 관한 인식의 차이를 낳는다.

주류 이론은 노동과 자본이 사이좋게(?) 생산에 참여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을 각자의 기여에 비례해 분배를 받는 모델이다. 여기서 분배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공동생산물을 각각 임금과 이윤으로 나눠갖는 모양새다. 생산물의 일정한 몫을 임금으로 받아가는 형태라 이론적으로 '후불'이 된다. ('현실적으로' 현금이 언제 노동자에게 주어지냐는 중요치 않다)

맑스는 다르다. 일단 주류에서는 생산물에 대한 소유여부가 불분명하다. 맑스는 생산수단의 소유자, 즉 자본가가 생산의 결과물을 전적으로 소유한다는 점을 명확히한다. 생산은 결코 사이좋은 '공동생산'이 아니고, 자본가가 임금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한 후에 생산을 지휘하고 그 결과물을 독점한다. 이런 의미에서 임금은 '선불'이다.

(실제로 월급은 후불인 경우가 많지만, 계약은 사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자본가는 이미 임금비용을 감안해서 생산에 돌입한다. 현실적인 선후불은 이 수준에선 고려대상이 아니다)

맑스의 전제를 따라 생산을 고려하면, '분배'의 모양새가 주류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일단 임금을 주고 생산에 돌입하고 생산현장에서 행해지는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은 철저히 자본가의 몫이다. 이제 자본가의 목표는 선불한 임금수준 이상으로 일을 시켜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는' 것이다.

분배를 '나눠갖는' 형태로 보는 것과 '뽑아내는' 형태로 보는 건 천지차이다. 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분배는 기여한 만큼 가져가는 정당한 행위이고,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봤자 정의로운 분배몫을 규정하는 정치적 싸움에서 멈춘다. 사실 '계급투쟁'을 말하는 비맑스주의적 이론들의 분배이론도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맑스 이론에서 이윤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얼마나 뽑아먹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노동시간, 노동강도, 생산기술 수준 등 온갖것들이 '분배'를 결정한다. 생산과 분배는 별개가 아니다. 

그래서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은 임금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산에서 얼마나 노동을 강제하는가가 분배를 결정한다. 그래서 계급투쟁은 언제나 "자본가가 먼저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