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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재생산론

재생산표식에 숨은 가정들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에는 단순화를 위한 몇가지 가정이 있다. 고정자본과 감가상각이 고려되지 않았고, 유동자본의 1회전기간만을 고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요 며칠간 재생산표식을 기업회계에 대응시켜보는 작업을 좀 해봤더니 몇가지 가정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미리 요약하자면, "생산한만큼 판매하고, 판매한만큼 구매한다"는 가정이다.

1) 화폐자본스톡(=생산요소 구매를 위한 현금성자산)의 증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분석기간 내 상품 판매의 대가로 얻은 화폐가치(매출액)는 전액 지출된다. 설사 기초 화폐잔고가 존재해 당기의 생산요소 구매나 자본가의 소비를 위해 미리 지출했다고 하더라도, 당기 매출액으로 그만큼을 채운다고 가정하면, 스톡의 증감은 없다.

2) 상품자본스톡(=완성품 재고)의 증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매출액은 당기 생산된 상품가치와 같다. 설사 기초의 상품재고가 기중에 판매됐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만큼의 당기 생산액이 재고로 쌓인다고 보면 스톡의 증감은 없다.

3) 생산자본스톡(=고정자산+원료/재공품 재고)의 증가는 잉여가치 중 소비되지 않고 추가자본으로 축적되는 부분에 의해 발생한다. 1)의 가정에 따르면, 화폐로 실현된 잉여가치 중 자본가의 소비를 뺀 부분 중에서 화폐로 추가 보유하게 되는 부분은 없다. 따라서 자본축적분은 모두 생산수단이나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생산자본스톡의 증가로 나타난다.

재생산표식 그 자체를 통해서 경기순환 또는 주기적 공황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이유는 이처럼 재생산표식이 기업의 화폐보유나 상품재고의 변동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모형이기 때문이다. 모형 내에 고정자본과 연간 회전율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화폐와 재고의 변동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은 모형은 여전히 균형성장을 위한 조건만을 보여줄 뿐이다. 오히려 재생산표식은 그러한 균형성장이 매우 엄격한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숨은 가정("생산한만큼 판매하고, 판매한만큼 구매한다")이 사라지는 지점부터 경기순환과 공황의 분석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